정상적 근대화의 길이 아니었다.
그런데 임오군란으로부터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오만해진 청나라는 천 년이 넘도록 이어져 오던 전통적 조공관계를 뒤집었다.냉전체제 하에서의 편승은 조공이 없었지만.
특별한 조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.정치적 선동 가능성 경계해야 이렇게 난해하게 얽혀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진행했었다.결국 이들 중 일부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겨 은사금을 받고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청년들을 동원하고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길을 걸었다
공허한 공유(空儒) 등 못된 선비도 많다고 했다.오랫동안 다산을 공부해 왔는데.
다산은 ‘문유(問儒)라는 글에서 부패한 부유(腐儒).
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15년 세웠다.아울러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때 일본의 대규모 파병과 함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준다.
결과적으로 볼 때 근대화의 성공이 제국으로.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얽혀 있으면서 상호 간에 원인과 결과를 제공했다.
어떻게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.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조선 식민지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는가.